난야서당



자아! 한번 생각해 보자

바로 몇 년 전의 우리 삶의 모습으로 한번 되돌아가보자!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한 40~50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 삶의 기본 양식이나 보편적 주거 환경이 조선(단군조선)의 사람들의 주거방식이나 삶의 양식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단칸방 짜리 온돌방식의 가옥구조가 우리 인간의 문명의 世紀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은 4000년 전의 이 땅의 사람들의 삶과 별 차이가 없다.

마르코폴로가 목격한 중국문명의 찬란함은 당대의 서양문명에 비하여 더 화려한 것이었다.
이미 청자기와를 올린 신라의 古都 서라벌, 불국사의 석굴암의 모습만 연상해도 그 웅장함과 단아한 문명의 는 쉽게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문명들은 결코 우리가 이 땅에서 40년 동안 자연을 착취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대중적인 인간 삶의 기본적인 연속성이 크게 흩트러진 적은 없다는 것이다.
20世紀 인류사를 특정 지우는 稀大의 사건은 20世紀를 통하여 기술(technology)과 과학(science)이 본격적인 랑대뷰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기술이란 本時 삶의 예술(the art or living)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기술이란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필요한 모든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까치가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끝에 颱風에도 견디는 견고한 집을 짓는 것은 분명 까치의 기술이다. 그것은 까치의 ‘과학’이 아닌 것이다.
과학이란, 인간과 그의 지식을 특정 지우는 어떠한 측면이다. 과학이란 본시 기술과는 무관한 인간의 사변이성(speculative reason)의 産物인 것이다.
과학의 특징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법칙으로 파악으로 것이다. 이때 ‘법칙적’이라는 것은 희랍人들에 의하여 ‘연역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는바 이 연역적인 인간의 사유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이라는 것은 기술의 전제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인간의 사유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이라는 것은 기술의 전제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인간의 사고가 고도化 되면서 생겨난 하나의 철학체계요 지식체계인 것이다.

원시인들이 토기를 굽는 것은 ‘기술’이다. 그러나 그들이 토기를 구울 때 과학이라는 연역적 전제를 꼭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흙과 불에 대한 과학적 일반적 이론을 전혀 몰랐을지라도 놀랍게 토기를 구워냈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만남!

이것은 순식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을 확대시켜버렸다. 과학의 성과는 놀라운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기술의 진보는 놀라웁게 우리의 과학적 사유의 영역을 넓혀갔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개발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 마구 개발될 수 있게 되고 인간 사유의 대상조차 아니었던 것들 마구 인간 사유의 영역 속으로 들어왔다. 空想이 마구 현실로 변모해가고 꿈이 現實로 된다는 즐거움에 도취하여 인간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忘却했다.
그들은 꿈 자체를 하나 둘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꿈은 無限히 꿀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하나의 망상이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신뢰다. 꿈의 상실은 인간 그 자체의 도덕적 파멸인 것이다.

4000년 동안 인간이 건드릴 수 없었던 聖城이 40년 동안에 무너졌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의 에너지를 문명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식이 여태까지 인류의 文明史의 어떠한 방식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에너지의 전환이 바로 에너지의 근원을 고갈시키고 파괴시키고 있다는 가공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自然의 에너지란 天地의 에너지이며, 이 천지의 에너지란 곧 生命의 에너지인 것이다.
자연 에너지의 고갈이나 파괴는 곧 생명의 고갈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밥을 갑작스레 먹으면 체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小食을 하거나 적당히 먹어서 나쁜 것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가련한 인간은 그것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

해방 후 불과 40~50년 동안에 과학과 기술의 랑대뷰로 이한 産業社會의 진보가 우리 문명의 모습을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대시켜놓았다면 이러한 역사의 과식, 과속, 과욕이 여러 가지 병적 부작용을 초래할 것은 뻔한 이치인 것이다.
天․地․人을 일컬어 三才라고 한다면 人이라는 一才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天地의 멸망은 곧 人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단군이래 4000년 동안의 연속성을 우리 한민족이 불과 40년 동안에 불연속성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21세기 우리 문명의 과제는 너무나 明若觀火하다.